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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만화 특징

해피한 주인 2024. 2. 2.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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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시자료

https://tv.kakao.com/v/415688909

2. 프랑스, 제 9의 예술, 만화

 

 

 

프랑스 만화의 특징

 

 

 

프랑스 만화를 손에 들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드커버의 화려한 장점과 완벽한 칼라로 이루어진 지면이다. 일반 단행본처럼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소장용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가격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친구나 자녀들을 위한 생일 선물로 많이 구입되기도 하지만, 결코 어린이나 청소년만을 대상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어린아이부터 해변에서 여유로운 휴가를 즐기는 노년층까지 프랑스 만화의 독자층은 연령과 직업, 사회계층 별로 폭이 넓다. 특히 프랑스를 이끌어갈 엘리트를 양성하는 특수전문대학(그랑제꼴) 도서관에 만화가 가득 것은, 프랑스 만화의 질적인 수준을 잘 말해준다. 다른 어떤 표현매체보다 자유로운 상상과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만화는 젊은 지식인들에게 따스한 감성과 유머로 긴장을 풀 수 있게 하는가 하면 치열한 경쟁의 시간을 피해 환상의 세계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필 수 있게 한다.

 

2. Alberto Aleandro Uderzo 알베르 우데르조

 

 

 

(1927- 2020)는 프랑스의 국민 만화 '아스테릭스 Astérix를 그린 삽화가로, '미국에 미키마우스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아스테릭스가 있다'라고 불리는 캐릭터의 창작자이다.

 

 

 

『아스테릭스』 시리즈는『꼬마 니콜라』 등으로 유명한 작화가·시나리오 작가인 르네 고시니 René Goscinny(1926-1977)가 줄거리를 쓰고 알베르 우데르조가 삽화를 그린 합작품이다. (참고로『꼬마 니콜라』의 그림은 장 자끄 상페 Jean-Jacque Sempe(1932-)가 그렸음).

 

1959년 알베르 우베르조와 르네 고시니가 주간 만화잡지『필로트 PILOTE』를 창간하는데 <아스테릭스>는 이 주간지의 사활을 건 전략상품으로 창간호를 장식한다.

1974년까지 주간지로 발행되다가 월간지로 바뀐『필로트』는 1989년에 종간되지만 만화 영역의 전문성 강화, 수많은 만화가 배출, 만화 개념을 혁신하는데 크게 기여한 잡지로 평가받고 있다.

 

1977년 르네 고시니가 별세한 뒤 우데르조가 글과 삽화를 맡아 시리즈를 이어오다가 2011년~2012년에 만화가 장이브 페리 Jean-Yves Ferri(1959-)와 디디에 콘라드Didier Conrad(1959-)를 영입하면서 2013년도 발간된 35권부터 자연스럽게 작가 교체가 이루어졌다.

 

 

 

 

 

2020년 3월, 알베르 우데르조가 심장마비로 사망. 알베르 우데르조는 생전에도 다수의 작품 경매를 통해 그 수익을 좋은 일에 쓰곤 했다고 한다. oo로 애쓰던 의료진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유족들이 그의 오리지널 드로잉 4점을 병원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이후 의료진의 작업 환경 개선에 쓰일 목적으로 5월 경매에 출품되었고 다행히 모두 새 주인을 찾게 된다.

 

 

   

최고의 콘텐츠로 시장과 평단에서 인정받은 아스테릭스는 110개국 언어로 번역된 텍스트 북, 영화, 게임, 캐릭터 굿즈, 연극, 라디오 프로그램 등으로 성공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사례가 되고 있다.  1989년 파리 외곽에 지은 테마파크 Parc Astérix(Astérix Park)도 있음. 초창기 원작 만화 사인본은 2017년 파리 경매를 통해 140만 유로(약 18억 8800만 원)에 거래되기도 한다고 함.

 

 

 

 

땡땡은 에르제(Hergé)라는 필명으로 더욱 유명한 조르주 레미(G. Remi)가 쓴 「땡땡의 모험 Aventures de Tintin의 주인공이다. 에르제는 오늘날까지 유명한 치즈 상표인 '웃는 암소 La vache quirit 를 그린 베자민 라비에(B. Rabier)가 프레드 이슬리(F. Isly)와 함께 만든 앨범 장난꾸러기 땡땡Tintin lutin, 1897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자신의 주인공에게 같은 이름을 붙인다. 골프 복장과 도가머리한 주인공의 모습 역시 그의 앨범의 한 등장인물에서 영감을 얻는다.

 

소비에트에 간 땡땡 Tintin aux pays soviets에 처음 등장하는 그 유명한 반항적인 도가머리는 주인공의 뚜렷한 특징이 되어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다. 라비에의 영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모스크바까지 자동차 여행을 한 라비에는 에르제 만화 주인공의 모델이 된다. 명령 연작은 1929년 벨기에의 청소년을 위한 주간지 르 쁘띠 띠엠 le Petit vingtième에 처음 게재되며, 첫 앨범인 소비에트에 간 Tintin 은 1930년에 출판된다.

 

 

 

 

 

 

 

   1929년에 탄생하여, 1930년 첫 앨범 「소비에트에 간 땡땡으로부터 1936년 푸른 연꽃 Le Lotus bleu과 1963년 달 탐험 On a marché sur la lune 을 거쳐 1980년 티벳에 간 땡땡 Tintin au Tibet, 그리고 유작인 1986년 Tintin et | Alph-Art에 이르기까지 24권의 앨범 연작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그렇게 잠수할 수 있었던 것은 에르제의 작품이 갖는 폭 넓은 역사에 대한 시각과 지리적 배경에 대한 관심 때문일 것이다.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에서 다시 이집트로 그리고 아시아로 땡땡의 모험은 우리를 사막과 원시림과 눈이 가득한 극지방의 설산으로 초대한다. 운명이 시작된 고대의 삶의 터전으로부터 인류 문명 발전의 상징인 달 탐험까지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며 지배적인 서구 문명의 시각이 아니라, 다정하고 따뜻한 친구의 섬세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통해 이 지구상의 다양한 문화와 그 근원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땡땡의 모험」 연작은 유머가 가득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잃지 않게 하는 서스펜스를 유지시킨다. 에르제는 자신의 만화를 통해 극단적으로 단순한 선과 색채 그리고 시나리오와 대사 등 만화의 모든 구성 요소들 간의 총체적 긴밀성을 만들어냈고, 유례없는 그래픽 서사양식의 구축에 성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름 한점 늘지 않고 늘 같은 모습으로 일루와 함께 세계 곳곳을 뛰어다니는 명령은 드골 대통령의 표현처럼 그의 '유일한 국제적인 적수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드골 대통령의 이름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에게도 에르제의 만화가 읽히는 것을 보면, 드골 대통령은 결코 땡땡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그의 모험을 영화로 만들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1946년 처음으로 기존의 만화를 찍어 만든 연속적인 슬라이드 형태의 영화가 이루어졌고 1947년 윌프리드 부슈리(W Bouchery)는 황금집게 발 달린 게 에서 영감을 얻어, 인형들을 사용한 영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실재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는 생명의 역할을 맡게 될 배우를 찾지 못해 오랫동안 미루어졌다.

  어느 날 땡땡의 모습과 태도를 떠오르게 하는 장 삐에르 빌보(J. P. Talbot)라는 배우가 발굴되고 1961년 명과 황금양털의 신비 Tintin et le mystère de la tolson for 그리고 1964년 팽팽과 파란 오렌지 Tintin et les oranges bleues)가 만들어진다. 몇 편의 TV를 위한 만화 영화가 시도되고, 1960년 영명과 태양의 신전 Tintin of le temple du soleil)이 장편 만화영화로 만들어진다. 프랑스의 유명한 샹송가수 자끄 브렐(J. Brel)이 이 영화를 위해 특별히 노래를 만든다. 그리고 1972년 앨범을 각색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가 써지고 <땡땡과 상어의 호수 Tintin et telacaux requins)가 만들어진다. 어느 경우이든 에르제의 작품 스타일이나 앨범이 주는 매력과는 동떨어진 작품들이다.

 

 

 

 

 

 

 

프랑스 국립만화영상센터 CNBDI

 

문화부 소속인 국립만화영상센터는 무엇보다도 만화와 영상이미지를 위한 박물관이며, 전시장이다. 점차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더해가고 있으며, 창작의 도구를 제공하는 실험실이고 디지털 이미지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 또한 기여하고 있다.

 

앙굴렘에 위치한 국립만화영상센터는 사회당 정권 하에서 대중적인 문화정책을 펼친 자끄 랑 J. Lang 장관의 제3의 예술로서의 만화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끄 랑 장관은 미테랑 대통령의 14년 재임기간 중에서 사회당이 정권을 잡았던 10년 동안 문화부장관직을 한 번도 떠나지 않았으며, 우파의 자금으로 좌파의 대중적 문화정책을 펼친 장관으로서 유명하다.

 

1984년 작고 랑 장관에 의해 국립만화영상센터의 사업계획이 발표되고 앙굴렘시는 폐쇄된 상삐넬(Champinelles) 맥주공장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예술과 커뮤니케이션 사업으로 새롭게 태어나고자 하는 앙굴렘시는 미술학교와 종이박물관등의 설립에 이어, 국립만화영상센터의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1985년 롤랑 카스트로(R. Castro)와 장 르몽(J. Remond)의 건물 건축설계도가 선발된다. 앙굴렘국제만화페스티발과 더불어 앙굴렘을 세계 만화의 메카로 자리 잡게 한 국립만화영상센터는 1990년 마침내 문을 연다. 국립만화영상센터의 일부를 구성하는 디지털이미지센터는 1년 먼저인 1989년에 문을 열었고, 국립만화영상센터 자체는 1990년 만화도서관과 함께 문을 열었으며, 만화 박물관은 1년 후인 1991년에 개관된다. 센터는 이후 많은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수많은 시청각 영상자료들을 생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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